Overseas Travel/중국西安~洛陽~靑島

뤼양(洛陽)

Peter Hong 2016. 8. 5. 15:29

※여행일 : 2016년 7월 27일


  낙양은 황하의 지류인 낙하(洛河)북쪽 강안(江岸)에 있어서 얻어진 이름으로, 全 중국의 중앙에 위치하여 ‘天下之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중국의 7대 古都로 꼽히며, 5천년 문명사 중에서 4천년이라는 장구한 도시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낙양이 중심이 된 하낙(河洛)지구는 중화문명의 발원지이며, 낙양은 세계최초의 계획적으로 세워진 도시이다. 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13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세워 서안과 더불어 중국역사상 자주 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비단길과 수,당의 대운하가 모두 이곳으로 통해서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였다. 기원전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을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하고 낙읍(洛邑)이라고 불렀다. 그 뒤 기원전 770년에 주(周) 왕조가 현재의 섬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으로부터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 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으며 당나라도 그대로 계승하여 동도라고 불렀다. 수·당 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비하여 낙양은 경제도시로소 대운하를 따라 소송되는 물자의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白馬寺, 중국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龍門石窟,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묻힌 香山등이 있다.


△묵었던 숙소

※낙양은 중국 7대 古都중 하나로 東周이후 後漢, 魏, 西晉, 北魏, 隨, 唐으로 이어지는 9개 왕조가 500년여간 수도로 삼았을 만큼, 고대 중국의 최대 번영기를 누렸던 화려한 도시였다.

△낙양성에서는 당나라 때의 화려한 경제 문화적 古都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으나 외국인 관광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개 지방도시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시장 거리 풍경은 화려하며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낙양성 려경문(麗景門)

이곳 모란꽃을 주제로 만든 도자기







白馬寺

백마사는 중국최초의 사원으로 68년 後漢때 설립되었다. 2명의 인도 고승인 축법란과 가섭마가 불교경전을 백마의 등에 싣고 왔다하여 백마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그들이 이곳에서 최초의 중국어 불경을 편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백마사(白馬寺)는 동한 68년에 중국 최초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처음 세워진 사찰이다. 그래서 ‘中國第一古刹’, ‘祖庭’, ‘釋源’이라는 칭호가 있다. 사찰 안에는 원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명제가 어느 날 금색을 한 신상에서 큰빛이 발하여 온 궁전을 가득 비추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부처님의 계시로 생각한 황제는 사신을 서역으로 보내어 佛法을 구하게 했다고 한다. 기원 후 67년 한나라 사신과 인도의 두 승려가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도착했으므로 명제가 몸소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듬해 68년 절을 짓고는 백마의 노고를 기려서 절의 이름을 백마사로 하였다. 백마사는 창건이래로 累代에 걸쳐 증축되고 수리되어 지금까지 아름다운 古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청량대: 두명의 인도고승이 불경을 번역하던 장소




지붕위에 소원을 비는 동전이 던저져 있다.









백마사 왼편에 관광객들을 위해 최근 건축한 태국사원과 미얀마 사원이 있는데 조잡스럽기 짝이 없었다.




미얀마 사원


이곳 뤼양 여행에서 안내와 점심식사를 제공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셨던 중국인 부부.  감사합니다.

△미얀마 사원에서는 뱀을 신으로 모신다.

△양곤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 사진이다. 반갑다.




△釋源은 백마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념관 건물이다.






△산문 왼편끝에 있는 인도고승 측법란의 무덤







△오른편에 있는 인도 고승 가섭마 대사의 무덤

△무덤 앞 비문


△당시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림과 글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문 앞 거북이의 머리 부분은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되었다.

△백마사 정문



△백마사 입구 주차장에서 양팔이 없는 장애인이 부채에 글씨를 쓰고 있다. 이곳에서는 유명인사라고 했다.


※점심식사를 초대 받았던 식당


△靑眞식당, 즉 회교 식당이다. 돼지고기 요리가 없는 곳이다.


△이것이 주메뉴라고 했다. 매우 맛이 좋았다.


△종업원이 작은 공연까지 한다. 노래가사에는 요리에 대한 소개가 담겨져 있다고 했다.


△식당 이름이다.





※용문석굴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4대 석굴 중의 하나로 낙양시 남쪽 교외 이하(伊河)의 양쪽 기슭 용문산과 향산(香山)의 암벽면에 조성된 석굴이다.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로부터 북제(北齊), 수(隨), 당(唐), 오대(五代)에 걸쳐 약 400여 년간 조성되었다. 북위 때 조성된 것이 30%, 당(唐)이 60%, 기타 조대(朝代)가 10%를 점하고 있다. 남북으로 1km의 구간에 2,300여 곳이 넘는 감실이 있고, 10만이 넘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비각도 2,800여점이 있어 서예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가치가 높다. 석굴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대(朝代)를 이어가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발견되는 대량의 실물 형상과 문자자료를 통해 중국의 고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발전과 변화를 고찰할 수 있다. 볼만한 곳은 賓陽三洞, 萬佛洞, 蓮花洞, 奉先寺洞, 藥方洞, 古陽洞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입구

빈양삼동




빈양삼동으로 가는 길옆 작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던 곳이다. 안타깝게도 문화대혁명시기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빈양중동

빈양남동

△빈양북동



빈양중동

빈양삼동은 빈양중동, 빈양남동, 빈양중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北魏시대 석굴의 대표작이며 건설기간 24년과 동원인부가 80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낙양목단석



萬佛洞 입구



萬佛洞에는 크기가 3cm정도인 15,000여개의 작은 불상들로 가득채워져 있는데, 불상의 표정이 제각각이라고 한다.





작은 구멍이 파인 곳 마다 불상이 있었지만, 문화대혁명 시기(1968~1976년)에 홍위병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었다. 그래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蓮花洞 : 천장의 아름다운 연꽃 조각 때문에 연화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奉先寺洞은 용문석굴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이며 그 중 석굴 한 가운데 위치한 노사나대상감(=盧舍那佛)은 용문석굴의 상징이다. 전장 17m, 불상 귀의 길이만 1.9m인 거대한 불상이다.

△노사나불(盧舍那佛) 왼쪽에 있는 문수보살상

노사나불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상 

△노사나불 오른쪽에 있는 사천왕상이다. 문화대혁명시기에 크게 훼손되었다.

△이 거대한 노사나불 불상의 모델은 당 고종 부인인 측천무후로 알려져 있다. 불상치고는 지나치게 풍만하고 여성적인 곡선이 돋보인다.


△봉선사동



△용문석굴은 492년 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수, 당을 거쳐 북송때까지 약400년간 공사가 진행되었고, 전체 길이 1km에  2,345개의 석굴과 14만 2,289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용문석굴

△가운데 보이는 거대한 불상이 봉선사동의 盧舍那佛이다.


※향산백원(香山白園)

   낙양시 남쪽 13km 위치한 산으로 향기로운 칡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어서 이름을 향산(香山)으로 하였다. 이하(伊河)를 중간에 두고 용문산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곳에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무덤인 백원(白園)이 있다. 백거이는 만년에 향산에서 살았고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하였으며 이곳에 묻혔다. 용문석굴(龍門石窟)매표소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관림(關林)

  삼국지의 영웅 관우가 죽어 묻힌 곳이라고 전하는 장소로 낙양시 남쪽에 있는 관람진에 있다. 명대에 사당을 세웠고, 송백을 심었으며 청댕 크게 확장하여 지금의 유모로 만들었다. 관림은 오래된 측백나무가 울울창창하고 고건축물들이 웅장하며 높은 능과 거대한 비석들이 있어서 기상이 삼연하고 그윽하다. 관우는 219년 겨울 손권의 군대에 패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듬해 손권이 관우의 수급을 낙양에 있던 조조에게 보낸다. 조조는 관우를 매우 흠모하였던 터라 왕후의 예를 갖추어 낙양성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장사를 지내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청(淸) 강희 5년에 낙양의 관우 능묘를 ‘忠義神武關聖大帝林’으로 봉하여 관림(關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관림(관우의 무덤)이다.


△관우의 무덤은 거의 작은 동산과 같은 크기이다.

무덤의 등급 : 일반 백성의 무덤은 분(墳)이라고 한다. 백제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이 그 예이다. 왕후의 무덤은 총(塚)이라 하고 황제의 무덤은 능(陵)이라고 한다. 능(陵)위의 무덤을 림(林)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인의 무덤을 뜻한다.  중국에는 산동성 취푸에 孔子의 무덤인 孔林과 뤼양에 있는 관우(關羽)의 무덤인 關林이 있다.


'Overseas Travel > 중국西安~洛陽~靑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다오(靑島)-노산(巙山)  (0) 2016.08.08
칭다오(靑島)  (0) 2016.08.07
화산(華山)   (0) 2016.08.05
시안(西安)  (0) 2016.08.01
시안(西安)과 뤼양(洛陽) 소개  (0) 201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