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Gathering/풍산홍씨청주종친회 37

풍산홍씨 (중앙일보 : 姓氏의 고향)

풍산홍씨와 그 계파 豊山洪씨는 高麗 高宗때 國學直學을 지낸 洪之慶이 시조다. 慶北 安東 豊山에 터 잡아 豊山을 본관으로 가문을 창립했다. 2세 侃(號 洪崖)은 고려문장 12大家의 한사람. 3세 侑와 4세 演, 浚은 모두 대제학에 올라 학문하는 전통의 집안을 다졌다. 高麗末, 왕조는 기울고 이성계가 무력으로 새 왕조창건의 야망을 드러낼 때 演의 아들 5세 龜는 낭장의 벼슬을 버리고 京畿 高陽 高峰山기슭으로 낙향, 은둔했다. 그의 큰 아들 伊는 멀리 호남 남평의 현령으로 갔다가 눌러 앉아 생애를 마쳐 후손들이 광주, 나주, 함평, 화순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남평공계). 둘째아들 儀와 셋째아들 俶(숙)은 고양에 머물러 후손들이 서울, 경기, 충주, 원주, 천안, 당진등지로 퍼졌다(모당공계, 습지공계, 생원..

풍산홍씨대종회 총회(전남 나주 도래마을)

◎ 장소 :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198 도래마을 ◎ 때 : 2023년 4월 16일 풍산홍씨 집성촌인 도래마을에서 풍산홍씨 대종회총회가 개최된다는 연락을 받고 드디어 유서깊은 도래마을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반가웠다. 모당공계로서, 그동안 나주 도래마을 일대와 화순, 광주지역 남평공계 조상님과 종친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풍산홍씨 대종회를 통해 남평공계에 대해 차츰 관심을 가지다보니 도래마을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오늘, 이곳에서 과거 남평공계 조상님들의 자랑스런 삶의 흔적과 발자취를 살펴보고 남평공계 종친과도 도타운 친교를 다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풍홍대종회총회에 참석했다. 도래는 마을 뒷산인 식산, 감태봉, 주산봉의 세 갈래로 부터 마을로 ..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한 부자가 잔치를 차리고 많은 손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이 집의 개도 제 친구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주인집 개는 들락날락 그릇 사이로 다니면서 손님들이 뜯고 난 뼈다귀며 고깃덩어리를 물어 날랐습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머슴이 개를 번쩍 들어 들창 밖으로 팽개쳐 버렸습니다. 땅에 나뒹군 개는 겨우 일어나 절름거리며 걸었습니다. 동네 개들이 그에게 모여들어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잘 먹었네! 그런데 자네는 왜 절룩거리나?" 그러자 다친 개가 말하였습니다.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도대체 어떻게 어디로 해서 바깥으로 나왔는지 그것 조차도 모르겠어!"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없는 사람일 수록 많은 것 처럼 하세를 부린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불..

설(雪) / 홍애(洪崖) 홍간(洪侃)​

晩來江上數峯寒(만래강상수봉한) 片片斜飛意思閑(편편사비의사한) 白髮漁翁靑蒻笠(백발어옹청약립) 豈知身在畵圖間(기지신재화도간) ​ 강 위로 날 저무니 봉우리들 차가운데 가볍게 비스듬 눈 내려 마음이 한가로워라 흰 머리 낚시 노인 푸른 삿갓 썼는데 제 몸이 그림 사이에 있는 줄 어찌 알까? ​ 작가는 고려후기 비서윤, 원주주관, 동래현령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인 홍간(?∼1304)이다. 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지경(之慶)이다. 1266(원종 7)년에 민지(閔漬)가 장원하였던 과방에 함께 등제하였다. 벼슬이 비서윤(祕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

아침단상

홍유손을 아십니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최고의 사나이,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노익장, 요즘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사람입니다 홍유손(洪裕孫, 1431~1529)의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입니다. 광진자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청한자 김시습처럼 방외인(方外人)으로 살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하였습니다. 홍유손은 문벌을 중시 여기는 조선시대에 미천한 아전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김종직의 문인(門人)이 되었으니, 그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는 능한 문장(文章) 덕분에 부역도 면제받았으며, 5세 신동이었던 김시습이 그의 시(詩)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벼슬을 포기하고 세상에 은둔하여 백수(白壽)를 누리고 살다..

茶山정약용 장인 홍화보의 용기

다산의 장인 홍화보(洪和輔)는 무신이었지만 사실 몸이 가냘퍼서 마치 여인과 같았다. 키도 작아서 어느 누가 보아도 무인처럼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맹은 남보다 뛰어 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호탕 하여 병법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 하였다. 1761년(영조37)에 장상(將相)과 대신들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천거 하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홍화보를 추천 하여 훈련원 초관(哨官)이 되었다. 홍화보의 인품과 명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였다. 1762년(영조38)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사도세자가 향후 조선의 국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조 역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세자가 국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세자에..

정약용 선생 ‘충주’에서 만나다

정약용 선생 ‘충주’에서 만나다 -다산 제2의 고향은 충주- 충주에서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추억이 있는 금가면 하담리의 다산유적지(모현정 주변)를 권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은 남양주이나 제2의 고향이 충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충주에는 다산선생의 조부모님, 부모님, 정약전 형님 내외분을 모신 다산 가족의 선산이 있었다. 선산은 선생이 7살 때 모친(해남 윤씨)을 여의고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자주 찾았던 안식처였다. 선선 가는 길에 장호원에서 쓴 ‘장호원에 당도하여’라는 시에서 ‘충주가 점점 가까워지니 고향과 흡사하네.’ 라고 할 정도로 충주를 고향으로 여겼다. 지금 충주 선산에는 다산 가족 묘소는 없다. 천주교 박해로 선산관리가 되지 않아 1981년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