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Chinese Language)/현대중국입문

7.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

Peter Hong 2015. 5. 25. 20:44

7.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

 

<요점정리>

 

1. 개혁개방 초기, 농가생산청부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 간단히 말해서 계약제) 실시를 골자로 하는 농촌 개혁으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개혁의 성과를 이어가고자 향진정부의 주도 하에 ‘향진기업(乡镇企业)’을 설치하고 운영하여 농촌의 산업화를 도모하였다.

 

2. 그러나 농가생산청부제의 효력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향진기업은 연해지역에서는 성공했지만 내륙지역에서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또한, 지방정부의 재정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하였고 농민들의 삶은 오히려 궁핍해졌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후반에는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3. 도시에서는 자영업체인 개체호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꼬리’로 비하됐던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점차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개체호는 종업원을 7명까지만 고용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제한이 경제발전의 병목으로 작용하자 1987년에는 그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사영기업(私营企业)’의 설립이 허용되었다. 도시에 실제적인 ‘자본가’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4. 이러한 변화로 인해 상품경제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 당 간부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과는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5. 1980년대 중반 개혁의 중심이 도시로 옮겨짐에 따라 개혁개방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당내 지도부들 간에 마찰이 생겨났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은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천윈, 리펑 등은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고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은 이들의 중간에 서서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아울러, 경제 부문에 비해 정치 부문에서는 별다른 개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부패 관료 처벌 및 언론 자유 확대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당 안팎에서 생겨났다.

 

6. 1989년 4월 후야오방 추모식을 계기로 천안문광장에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점차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시위로 확대되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베이징에 군대를 투입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6월 3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며 총기를 난사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6월 4일 계엄군이 광장을 접수하였다. 개혁개방의 열기는 급속하게 냉각되었고, 개혁파 지도자들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7. 천안문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민주화운동에서 시위대는 4월 학생시위를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왜곡했던 것을 시정하고, 부패한 당 간부와 관료들을 처벌하며,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주적 절차를 강화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당시 당내 강경파들의 말대로 이들이 사회주의 철폐나 공산당 타도 또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천안문 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희생자들의 명예는 현재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보충연습문제)

 

1. 1980년대 중후반, 지속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개혁파 지도자 두 명은?

① 덩샤오핑, 리펑 ② 후야오방, 자오쯔양

③ 천윈, 리펑 ④ 덩샤오핑, 후야오방

 

2. 1989년 6월 천안문사건 직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② 당 간부 및 관료들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③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가 점차 심화되었다.

④ 경제에 비해 정치 분야의 개혁이 더 광범위했다.

 

3. 1980년대 중국 개혁개방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기존의 낡은 제도를 폐지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②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③ 개혁개방은 농촌에서 먼저 시작된 후 도시로 확대되었다.

④ 개혁개방 정책이 체계적인 계획 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4. 개혁개방 초기(1980년대) 농촌개혁의 성과와 한계와 관련된 설명 중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농가생산청부제는 농민들의 빈곤을 경감시키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② 생산성 정체와 저곡가 정책으로 농업 수익성이 저하되면서 이농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하였다.

③ 향진기업은 농촌 개혁의 핵심으로 노동, 자본, 경영 조직 등을 농민들로부터 충당했다.

④ 1980년대 후반 향진산업화는 모든 농촌지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5. 다음 중 ‘중국 도시지역에서 소규모 상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7명 이하의 자영업체’를 일컫는 말로서, 개혁개방 초기 그 수는 크게 증가했던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① 집체호(集體戶) ② 만원호(萬元戶)

③ 개체호(個體戶) ④ 폭발호(暴發戶)

 

(정답) 1② 2④ 3① 4④ 5③

해설 4 : ④ 향진산업화의 성공과 실패는 지역에 따라 뚜렷이 구분되었다. 일반적으로, 연해 인근 농촌지역은 성공을 거둔 반면, 내륙지역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설 5 : ③ 문제는 개체호에 대한 설명이다. 개혁개방은 과거 집체호를 개체호로 전환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었다. 아울러 개체호와 사영업자의 발전으로 인해 소득이 1만위안 이상을 버는 만원호(萬元戶)가 급속히 증가했으며, 졸부라는 의미의 폭발호(暴發戶)라는 어휘 또한 출현했다.

 

<요점정리>

 

1. 농가생산청부제의 도입으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으나 곧 한계에 봉착했다. 또한 향진정부의 주도 하에 향진기업을 설립하며 농촌산업화를 추구하였으나, 연해지역 및 대도시 인근 지역에서는 성공적이었던 반면에 내륙 지역에서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이에 따라 내륙 지역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농민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2. 도시개혁이 시작되면서 소규모 자영업체인 개체호와 개인 자본으로 설립된 독자기업인 사영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로 인해 상품경제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 당 간부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과는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3. 1980년대 중반 개혁의 중심이 도시로 옮겨지자 경제개혁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당내 지도부들 간에 마찰이 생겨났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은 개혁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천윈, 리펑 등은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경제 부문에 비해 정치 부문에서는 별다른 개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당 안팎에서 생겨났다.

 

4. 1989년 4월 후야오방 추모식을 계기로 천안문광장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중 시위로 확대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하였으며,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함에 따라 시위가 점차 격렬해졌다. 6월 3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면서 총기를 난사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6월 4일 계엄군이 광장을 접수하였다.

 

<주요용어>

 

1. 향진기업

1980년대 초반 가정연산승포책임제가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후 농업생산량이 증가되고 지역 시장이 발전한 결과, 농촌에는 소규모 경공업 위주의 농촌산업화를 추진할 수 있는 초기 자본이 마련되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중반부터 향진정부의 주도 하에 해당 지역의 농민 노동력과 농업생산물을 활용하는 소규모 기업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를 ‘향진기업’이라 일컫는다. 향진기업의 대부분은 집체소유제 형태를 띠었으며, 1992년 9월까지 전국적으로 약 550만 개가 설립되었다. 연해지역 및 대도시에 인접한 농촌지역에서는 향진산업화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반면, 내륙지역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

2. 개체호

개체호는 중국 도시지역에서 소규모 상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7명 이하의 자영업체를 일컫는다. 이러한 개체호는 개혁개방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로 불리며 비판의 대상이었다. 1978년 개혁개방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직장을 안배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영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개체호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국가는 1984년 이들 개체호를 합법화시키면서 7인 이하의 종업원들만 고용하도록 규정하였다. 개체호 활동은 주로 국영기업 등 대기업이 참여하지 않는 소규모 제조업, 판매업, 서비스업 등에 집중되었다.

 

3. 私營기업

1980년대 중후반 상품경제가 확산되면서 개체호 활동도 번성하였지만, 7인 이하의 종업원을 고용해야 하는 규정이 기업 발전에 제도적인 장애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7년에 국가는 비국영기업이면서도 8인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 범주를 마련하여 제도적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이에 따라 신설된 기업 범주가 사영기업이다. 사영기업은 이후 1인이 투자·경영하는 독자기업, 2인 이상이 투자·경영하는 동업기업(合伙企业), 주주의 출자액에 따라 책임을 구분하는 ‘유한책임공사’로 세분화되었다.

 

4. 천안문사건

1989년 6월 초 정치 개혁을 주장하며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을 인민해방군이 탱크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을 일컫는다. 4월 중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의 추도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기숙사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 민주화와 사회 개혁 등을 요구하는 시위로 확대되었다. 학생 시위는 노동자 및 공무원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당시 빈부격차, 물가상승,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 개혁개방에 따른 부작용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 정부는 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3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국제적십자협회는 사망자의 수가 2000여 명에 이른다고 발표한 바 있다. ‘6.4 운동’, ‘천안문 사태’, ‘천안문 민주화운동’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7.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hwp

7.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hwp
0.0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