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1. 『왕좌의 게임』, 시즌 6, 중에서
“Can you forgive me?”
“There's nothing to forgive.”
“Forgive me.”
“Alright, alright.. I forgive you.”
“날 용서해줄래?”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용서해줘!”
“알았어, 알았어.. 용서할게.”
2.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에리히 시갈(Erich Segal)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아서 밀러(Arthure Miller) 감독의 1970년 영화 『Love Story』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로 인정받으면서 많은 곳에서 인용되었죠. 이 대사는 두 번 등장합니다. 연인(戀人)간에 그리고 부자(父子)간에 용서를 구하고 상대방은 모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번은 여주인공 제니퍼가 사랑하는 연인 올리버에게, 또 한 번은 올리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
사랑의 달, 5월의 첫 날입니다. 오늘은 ‘용서’에 관한 정호승 시인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용서는 신의 몫이다”
사랑보다 용서의 문제가 제 삶의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누릅니다. 사랑이 시작되면 고통과 함께 용서의 문제 또한 시작된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을 제 심장에 비유한다면 좌심실은 고통의 방, 우심실은 용서의 방인가 봅니다. 그 두 개의 방이 쉬지 않고 힘차게 움직여 제 온몸에 고통과 용서의 혈액을 골고루 순환시킵니다. 그러니 두 방의 움직임을 중단시키고 싶어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중단시켜버리면 그 순간 저는 생명을 잃고 맙니다.
그렇지만 제 사랑이라는 심장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용서에서 오는 고통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도 용서해야 할 일보다 용서받아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만, 늘 용서해야 할 일만 생각해 고통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저는 지금 60대에 성큼 들어섰습니다. 한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점차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사랑도 견딜 수 없었지만 용서 또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든 안 하든 용서하든 안 하든, 당장 뭔가 확실해지지 않으면 지구가 두쪽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러나 차차 나이가 들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혹 용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을 잘 다스리고 견딜 수 있는 여유 또한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서라고 생각하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이미 용서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용서하기가 힘이 듭니다. 아직도 저이 ‘용서’라는 말 속에는 굳어버린 콘크리트처럼 분노와 상처와 원망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콘크리트를 파괴해버리기가 밤하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밥과 옷과 집이 없어서 살아가기 힘든 게 아니라 용서하지 못해서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싹트는 미움과 증오의 독버섯이 매일 저를 병들게 합니다.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독버섯의 독한 향기가 퍼져 나옵니다.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끝에 미움의 감정을 다 없애버렸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독버섯의 역겨운 향기는 더욱 강해집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서’라는 말은 결국 제게 어울리지 않는 사치한 말입니다.
어떤 때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보다 차라리 미워하는 일이 더 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움이란 상대방에게 얻은 배반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미움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용서라는 결과에 다다를 수 있다, 따라서 미움과 증오 없는 용서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과 증오는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과정을 통해서도 결국 용서하지 못한 채 빈 들판에 망연히 서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용서는 신의 몫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절대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울 때 신의 어깨에 좀 기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싶습니다. 결국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신께서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용서하지 못하니까 인간이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경우, 용서하려고 전정 최선의 노력을 다 했는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이 스스로 하느님한테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고 여주인공은 회의를 갖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인간인 내가 결코 용서할 수 없기에, 죄는 인간의 몫이기에 용서는 결국 신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누구에게 미룰 수 있고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산문집, 비채, 中에서,
4.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어제 회의를 끝내고 근처 서점에 들렀다가 가판대에서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The Forgiveness Project, 마리나 칸타쿠지노, 니컬러스 토멀린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란 책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학대나 폭력, 테러, 학살, 전쟁 등으로 물리적·정신적 외상을 입었지만 세계적인 자선단체 ‘용서 프로젝트(The Forgiveness Project)’를 통해 복수를 하는 대신 용서와 씨름해온 46명의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p.s.
지금까지 『왕좌의 게임』, 『러브 스토리』, 『밀양』,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를 차례로 나열하면서, 다양한 관계와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상처와 용서의 일부를 보았습니다. 책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의 추천평에 올라 있던 짧은 글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용서는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우리 사회는 ‘해결 매뉴얼’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피해란 원래 복잡하고 다양하고 모순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고성은 건국대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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