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Chinese Language)/현대중국입문

6~14강 강의내용 보충자료

Peter Hong 2015. 5. 27. 01:50

6. 덩샤오핑이 열어젖힌 개혁개방

 

1.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승계한 화궈펑(華國峰)은 마오가 결정한 정책과 그가 지시한 사항들은 모두 옳다는 양개범시(兩個凡是)론을 주창하면서 마오의 권위에 기대어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잘 한 일도 많지만 그 역시 실수와 오류가 있었다(3-7 30%는 잘못했고 70%는 잘했다)며, 무엇이 진리인지는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할 수 있다(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고 화궈펑을 비판하였다. 화궈펑과 덩샤오핑 간의 이 논쟁을 ‘진리표준논쟁’이라고 하며, 덩샤오핑의 이러한 입장을 ‘실사구시(实事求是)론’이라고 한다.

 

2.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마오 시대의 계급투쟁중심노선을 폐기하고 개인숭배를 금지하며, 향후 정국 운영의 최대 목표를 생산력 발전을 통한 경제건설로 정했다. 현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중심 목표를 확인함으로써 개혁개방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농촌 개혁이 시급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러나 어느 분야부터 어떻게 개혁개방을 실시할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침은 마련된 것이 없었다.

 

3. ‘개혁개방’은 국내의 (농촌 및 도시) 제도 ‘개혁’과 중국 경제의 대외 ‘개방’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개혁은 농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나중에 (1984년이 되어서야) 도시로 확대되었는데, 개혁개방 초기 농촌과 도시 개혁 방안의 핵심은 각각 농업과 기업 생산 활동에서 ‘계약제’를 도입한 것이다.

 

4. ‘농촌에서의 개혁은 농가생산청부제(계약제)의 도입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이는

농촌집체 소유의 토지를 개별 농가들로 하여금 직접 경작하게 해서, 국가에 납부해야 할 생산 분량을 납부한 후에 그 나머지 추가 수확물을 농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농가생산청부제가 정착되자, 이전에 농촌제도의 근간으로 작용했던 인민공사가 폐지되고 향진 정부로 대체되었다.

 

5. 도시 지역에서의 개혁은 기업 개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공장 및 경제활동 단위 별로 계약을 맺어서 추가로 생산된 부분을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한편, 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을 철폐함으로써 도시 단웨이 체제 하의 이른바 ‘철밥통’을 깨뜨린 것이다. 또한, 1984년에는 당시 점점 늘어나고 있던 도시의 소규모 자영업자들, 즉 개체호(個體戶 个体户)에게 합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6. 개방, 즉 경제의 대외개방은 1980년 남동연해지역에 4개의 경제특구(深圳, 珠海, 厦门, 汕头)를 설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하이(上海)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 도시들을 경제특구로 지정한 이유는 홍콩과 타이완과 가까워서 홍콩, 타이완, 동남아 화교 자본을 받아들이고 생산물을 수출하는 데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7. 덩샤오핑 자신이 ‘摸着石头过河’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은 매우 조심스럽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을 ‘자본주의의 도입’ 또는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적절한 설명방식이 아니다.

 

8. 상품경제와 시장의 범위가 확산됨에 따라 사회주의 이념 및 제도의 틀과 ‘상품, 시장’과 같은 요소의 결합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덩샤오핑은 그의 실용주의적 사상이 잘 드러나는 ‘흑묘백묘론(不管黑猫白猫捉到老鼠就是好猫)’, 일시적인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을 감수한 ‘선부론(让一部分人一部分地区先富起来)’ 등을 제시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9. 이후 중국공산당은 중국 사회주의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초급단계론[중국은 이미 사회주의에 진입했으나 초급단계에 처해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생산력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 등을 통해 이념과 현실 간의 모순적인 상황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10. 중국의 개혁개방은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기존의 틀 내에 점차 상품경제와 시장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즉, 구제도와 신제도를 동시에 유지하는 이중트랙(雙軌制)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의 비교우위[중국의 최대 장점]가 가장 뚜렷했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출중심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전략을 취했다.

 

7.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혼란

 

1. 개혁개방 초기, 농가생산청부제(家庭联产承包责任制 간단히 말해서 계약제) 실시

를 골자로 하는 농촌 개혁으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개혁의 성과를 이어가고자 향진정부의 주도 하에 ‘향진기업(乡镇企业)’을 설치하고 운영하여 농촌의 산업화를 도모하였다.

 

2. 그러나 농가생산청부제의 효력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향진기업은 연해지역에서는 성공했지만 내륙지역에서는 대부분 실패하였다. 또한, 지방정부의 재정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하였고 농민들의 삶은 오히려 궁핍해졌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중후반에는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3. 도시에서는 자영업체인 개체호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꼬리’로 비하됐던 이들은 1980년대 중반 점차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개체호는 종업원을 7명까지만 고용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제한이 경제발전의 병목으로 작용하자 1987년에는 그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사영기업(私营企业)’의 설립이 허용되었다. 도시에 실제적인 ‘자본가’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4. 이러한 변화로 인해 상품경제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 당 간부와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주의적 평등 이념과는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5. 1980년대 중반 개혁의 중심이 도시로 옮겨짐에 따라 개혁개방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당내 지도부들 간에 마찰이 생겨났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은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천윈, 리펑 등은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고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은 이들의 중간에 서서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아울러, 경제 부문에 비해 정치 부문에서는 별다른 개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부패 관료 처벌 및 언론 자유 확대 등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당 안팎에서 생겨났다.

 

6. 1989년 4월 후야오방 추모식을 계기로 천안문광장에서 시작된 학생시위는 점차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시위로 확대되었다.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베이징에 군대를 투입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6월 3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면서 총기를 난사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6월 4일 계엄군이 광장을 접수하였다. 개혁개방의 열기는 급속하게 냉각되었고, 개혁파 지도자들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6.4 천안문사태)

 

7. 천안문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민주화운동에서 시위대는 4월 학생시위를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왜곡했던 것을 시정하고, 부패한 당 간부와 관료들을 처벌하며,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주적 절차를 강화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당시 당내 강경파들의 말대로 이들이 사회주의 철폐나 공산당 타도 또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천안문 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희생자들의 명예는 현재까지도 회복되지않고 있다.

 

8. 개혁개방의 심화에 따른 문제들

 

1. 6.4 천안문사건(1989) 이후 급속히 위축되었던 개혁개방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도시 시찰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흔히 남순강화(南巡讲话 1992.01~02)로 불리는 이 남방 시찰에서 덩샤오핑은 지난 10여 년간의 개혁개방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개혁개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천명하였다.

 

2.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계획과 시장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지속되었던 ‘姓社姓资’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에 따르면, 개혁개방은 다음 세가지 목표를 달성하는데 유리한지 아닌지(三個有利于)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 국력 강화, 인민들의 생활수준제고”가 그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난 10여 년 간의 개혁개방으로 인해 위 세 가지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으니 개혁개방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발언들로 인해 계획경제를 숭배하는 당내 보수파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개혁개방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3. 남순강화 이후 해외자본들 특히 서구 자본들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가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에서는 주식열풍이 불기도 했다. 또한 도시 관료나 단웨이 소속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에 뛰어드는 창업 열풍이 불었다. 이를 ‘하해(下海)’ 현상이라 부르는데, 1980년대 중반 개체호의 성장을 배경으로 1차 하해 현상이 있었으며, 남순강화 이후에 보다 더 큰 규모의 하해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4.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서 표방한 내용은 1992년 국가주석이 된 장쩌민(江泽民)의각종 정책에 곧바로 반영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시장경제론”이 주창되었으며, 1993년 헌법에서는 “사회주의시장경제가 계획경제를 대체”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5. 이에 따라 중국의 농촌과 도시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개혁개방이 다시 가속화되자 도시에서는 기업의 생산 활동과 도시 건설 등에 필요한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그러나 농촌 지역의 사정은 1980년대 중반 이래로 더 나아진 게 없고 지방정부의 각종 세금 부과 등으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에 따라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호구관련 법률과 규정을 어기면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유입되었다. 농촌호구를 지닌 채 이렇게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농민공(农民工)이라고 하며, 이들이 대규모로 도시에 유입되는 현상을 민공조(民工潮)라고 한다.

 

6.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민공조 현상의 원인은 크게 (1) 농촌에서의 배출 요인, (2) 도시의 흡수 요인, (3) 모순적 정책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1980년대 중반 이후 농촌산업화를 위해 추진했던 ‘향진기업’(乡镇企业)이 대도시와 연해 인근의 농촌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내륙 지역 농촌에서는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만 가중시킨 채 실패로 귀결되었다. 동시에 내륙 농촌의 지방정부는 지역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새로운 형태의 각종 세금을 통해 조달하고자 함으로써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가중되었다. (2) 도시지역에서는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도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각종 일자리가 생겨났다. 도시민들이 꺼려하는 이른바 3D, 또는 4D 업종이 대부분이었지만, 농민들에게는 농사를 짓는 일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보장해주는 일들이었다. 또한 화려한 도시 문화는 농촌의 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하였다. (3) 엄연히 호구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도시 지방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 및 국내 자본을 유치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저렴한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일부 도시 정부는 농촌 지방 정부와 결탁하여 농촌노동력을 집단적으로 수입하기도 했으며, 농민공들의 개별적인 도시 유입을 방치하였다. 농촌 지방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농민공들이 도시에서 번 돈을 농촌지역으로 송금해오기 때문에 오히려 도시 진출을 장려하거나 묵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7. 민공조 현상, 즉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농촌의 ‘농업’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남자들과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남에 따라 농촌 노동력이 고령화, 여성화되었으며, 농지 관리가 소홀해진 탓에 토지 생산성도 악화되었다. 농촌에서의 이러한 문제는 2000년 이후 이른바 ‘삼농(三农; 농업, 농촌, 농업) 위기’를 낳게 되었으며, 오늘날 중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8. 도시로 진출한 농민공들은 도시 호구가 없는 탓에 도시의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하며, 도시민들로부터 각종 차별과 질시를 받으며 생활해야 했다. 2000년 중반 이후 국가는 점진적으로 농민공의 처우를 개선하고 호구제도를 개선해오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9. 국가 소유의 국유기업들은 남순강화 이후 부쩍 많아진 외국기업 및 사영기업등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국유기업의 종신고용제도와 높은 수준의 복지혜택 등으로 인해 기업 채산성이 약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 전면적인 국유기업 개혁 작업이 시작되었다. 규모가 크거나 중요한 산업분야의 국유기업은 그대로 유지하되, 규모가 작거나 경공업 및 서비스 산업 분야의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대폭적인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한 것이다.

 

10. 이에 따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밀려났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이를 ‘실업’이라 하지 않고 ‘하강’(下岗)이라고 불렀다. 국가가 도시민들에게 일자리와 사회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단웨이 체제가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실업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강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11. 국유기업의 개혁과 동시에 단웨이 체제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양로보험과 실업보험에서 개인 부담 비중을 늘려왔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러한 사회보험들이 거의 시장화되었다. 1998년부터는 단웨이들이 더 이상 주택도 제공해주지 않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주택이 상품화되면서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약 40여 년 간 지속되어온 단웨이 제도가 거의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9. WTO 시대 중국 경제의 변화

 

1. 1980년대 경제개방은 화교를 중심으로 한 중화권의 자본을 유치하는 전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4개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도시들의 위치는 개혁개방 초기의 경제개방 전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2년 남순강화 이후의 경제개방은 화교자본만이 아닌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2. 남순강화 이후 외국인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의 총액과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1990년대에 중국이 유치한 FDI는 주식투자 등과 같은 단순한 형태의 투자가 아니라 해외자본이 직접 중국 현지에 기업을 설립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기업을 경영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이른바 그린필드(greenfield) 방식의 투자로서 중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환영할만한 방식이었다. 여기에 더해 중국 정부는 해외자본이 설립한 기업들에게 일정 부분의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고, 첨단 설비와 기술을 도입하며, 수입한 만큼은 반드시 수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해외기업들은 대부분 중국 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였는데, 이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전면적으로 진행된 세계화 또는 전지구화(globalization)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 개혁개방의 심화과정에서 중국도 자연스럽게 세계경제 체제의 한 축으로 편입되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상품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중국에 대해 조건부로 관세 혜택 등을 제공하는 최혜국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매년 미국으로부터 최혜국 지위를 부여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자국 경제의 성장에 따라 미국 이외의 다른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1995년 이전에는 GATT)에 가입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2001년 11월 마침내 WTO회원국이 되었다.

 

4. WTO 가입을 전후하여 중국 내에서 WTO 가입에 대한 비판들도 적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WTO 가입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FDI 유치 규모를 늘려 개혁개방을 가속화함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GDP 규모를 안정적인 수준에 올려놓고자 했다. (2) 가장 기본적인 경제성장 전략은 수출중심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었는데, WTO 체제 외부에서는 관세 및 수출품복 등의 측면에서 불리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3) WTO 가입을 통해 중국 기업과 금융의 국제신인도를 향상시켜서 해외무대로 진출하고자 했다. (4) WTO 가입을 통해 각종 규정을 국제수준에 맞춰나감으로써 국내의 각종 제도 개혁을 심화하고자 했다.

 

5. 중국인들이 ‘입세’(入世)라고도 부르는 WTO 가입을 통해 중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오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으며, 전세계 시장에 상품을 판매해오면서 세계적인 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연 평균 약 10%의 GDP 성장률과 연 평균 16.5%의 무역규모 성장률은 세계 경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6. 중국의 부상에 따라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중국위협론’이 제기되어 왔다. 일련의 연구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은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이자 패권적인 국가였다. ‘중국위협론’은 최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세계무대에서의 부상을 과거의 패권국가로의 회귀로 간주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200-300년 전과 같이 경제규모만으로 국가 간 우열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중적인 시대이다.

 

7. 중국경제의 성장 과정은 세계경제체제와의 관련성 하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과 토지 위에 서구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개혁개방 이후, 특히 WTO 가입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2012년 중국은 세계경제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국가가 되었다.

 

8. 이렇게 중국경제가 세계경제체제에 깊숙이 편입됨에 따라 여러 가지 관련현상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를 흔히 ‘중국효과’(China Effect)라고 하는데, 주된 긍정적 또는 부정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중국이 WTO에 가입했던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세계경제가 3.2% 성장했는데, 이는 세계경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높은 성장이며, 중국 경제의 성장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2)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은 전세계 각 국가에 저렴한 가격의 상품을 공급함으로써 세계 각국의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3) 중국 제품이 범람함으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 중국이 강세를 보이는 제품의 산업분야가 사라지는 결과도 생겨났다. (4) 중국경제의 발전에 따라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국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9. 2013년 중국은 GDP를 기준으로 할 때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한 2013년에는 교역규모에서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위의 무역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중국이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름에 따라 이러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들도 생겨났다. 2000년대 이후 신흥경제 국가 네 나라를 지칭하는 브릭스[BRICs](Brazil, Russia, India, China; 2000년대 초중반의 상황을 가리켰던 말인데 이미 오래 전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친디아[Chindia: China + India] (21세기 세계경제 발전의 주도국),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경제가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차이메리카(Chimerica), 세계의 주요 2개국, 즉 미국과 중국을 가리키는 G2 등이 그것이다.

 

10. 광대한 중국은 어떻게 통치되는가?

 

1.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의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요 기관들에 권력을 분산시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를 권력분립이라 하는데 대표적인 권력분립의 방식에는 삼권분립과 지방분권이 있다. (1) 삼권분립은 실제 국정을 담당하는 행정부[정부, 내각], 헌법과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부[국회, 의회], 법률을 적용하는 사법부[법원]를 분리시켜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2) 지방분권은 외교, 군사 등을 제외한 전반적인 국정의 상당부분에 대해 지방 정부에게 책임과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중앙정부의 힘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고 국정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식이다.

 

2.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중국은 삼권분립이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반면, 중국의 넓은 영토와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지방분권의 정도는 한국에 비해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3. 중국 헌법상의 최고 권력기구는 全国人民代表大会[全国人大; 이하 전국인대]이다. 전국인대는 한국의 국회와 마찬가지로 입법권과 예산의결권을 갖지만, 이 이외에도 국가주석과 국무원 총리 등 국가의 주요 책임자의 선출을 제청하거나 승인하는 권한을 가진다. 전국인대 대표의 임기는 5년이며 연임이 가능하다. 이후에 살펴볼 다른 주요 국가기관 및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의 임기 규정도 전국인대와 동일하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권력은 집권자들에게 큰 문제가 없는 한 10년 단위로 교체된다. 전국적 차원에서 전국인대가 있는 것처럼, 각 성·시·자치구와 인민해방군에는 성·시·구·군 인민대표대회가, 그리고 현·시 단위에는 현·시 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되어 있다. 하급 단위의 인민대표들 중에서 상급 단위의 인민대표가 선출되는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된다.

 

4. 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政协; 이하 정협]는 통일전선 협의체이다. ‘통일전선’이란 어떤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집단과 일시적으로 연합하는 전술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타이완과의) 통일과 사회주의혁명 완성을 위해 중국공산당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집단들과 연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의 패망 이후 1946년 국민당과 공산당 등이 통일된 중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국민적 협의체로 중국정치협상회의를 결성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탈퇴와 국-공 내전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졌으며, 1949년 그 후신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재출범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 내 8개의 민주당파, 공산주의청년단, 대만민주자치동맹, 전국총공회 전국부녀자연합회 등 각종 정치, 사회단체가 참여하며,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건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5. 国务院(국무원)은 국가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한국의 내각(행정부)에 해당한다. 공산당의 노선과 주요 정책을 바탕으로 전국인대에서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기관으로 형식적으로는 전국인대의 감독과 지시를 따른다. 국무원은 산하에 경제, 무역, 외교, 교육, 복지, 노동 등을 담당하는 26개의 부처를 두고 있으며, 국가 운영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기관이어서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관료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다. 국무원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 또는 중앙정치국 위원을 겸임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 겸직의 방식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국무원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또한 당의 정책과 결정이 실제 국정운영 과정에 신속하게 반영된다.

 

6. 중국의 법원과 감찰원(검찰)은 전국인대의 감독을 지시를 받는다. 최고인민법원/검찰원 —고급 —중급 —기층 인민법원/검찰원의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재판제도는 한국과 달리 2심제로 운영된다. 이밖에 한국의 경찰조직에 해당하는 조직으로 공안 또는 경찰로도 불리는 공안부가 있다.

 

7. 중국 헌법에서는 전국인대가 최고국가권력기구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구는 중국공산당이다. 국가 운영의 기본 원칙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반면, 공산당의 운영 원칙은 장정(章程)에 명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산당과 국가는 형식적으로는 별개의 기구이며,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즉, 이끄는) 위치에 있다.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직책은 중앙위원회 총서기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직책은 국가주석인데, 현재는 시진핑이 겸임하고 있다. 1949년 건국 이후 덩샤오핑 집권 시기까지는 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나누어 맡았으나, 장쩌민 이후부터는 위 두 요직과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포함한 최고의 4개 직책을 한 사람이 겸임하는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

 

8. 중국 공산당원의 숫자는 매년 증가해오고 있으며, 2014년에는 거의 9천만 명에 육박할 정도이다. 2002년 이후 최근 10여 년 간의 증가세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장쩌민 집권 말기에 삼개대표사상이 제창되면서 ‘홍색 자본가’로 불리는 기업 대표 및 고위경영자들의 입당이 허용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9. 당 장정에 따르면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全国代表大会[党6大会; 또는 당전국대회]이다. 앞서 언급한 입법기관이자 헌법상 최고국가권력기관인 전국인대(全国人民代表大会)와 명칭이 유사하니 혼동하지 않도록 하자. 당대회 대표의 임기는 5년이며, 당대회는 공산당의 새로운 기(届)수가 시작되는 해에 한번만 소집된다. 당대회(당 전국대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중국공산당을 대외적으로 대표하고 당대회의 결의사항을 실행하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것이다.

 

10.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약칭: 중공중앙 또는 당중앙]는 공산당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임기 5년(연임 가능)인 약 350명(정위원 200여 명 + 후보위원 150여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1년에 1-2차례전체회의를 개최하는데, 역대 중국공산당의 정책이나 노선과 관련된 주요한 결정들이 이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언론이나 중국관련 서적에서 “중국공산당 xx기 x중 전회”로 언급되는 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개혁개방 방침이 결정된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중공 11기 3중 전회”는 ‘중국공산당 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줄여 말하는 것이다.

 

11. 중공 중앙위원회의 최고 수장인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을 대내외적으로 대표한다. 당 전국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 위원들 중에서 다시 25명 내외의 인원이 선출되어 중앙정치국을 구성한다. 여기서 다시 7-9명을 선출하여 상무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이는 최고 실권자들의 협의기구에 해당된다. 중국 내의 서로 다른 다양한 정치계파들은 자기 측의 사람들을 중앙위원회와 중앙정치국 그리고 상무위원회에 보다 많이 진출시키기 위해 치열한 대외적 경쟁과 물밑 암투를 벌인다. 이들 간의 암투는 2013년 보시라이 사건 등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외부로 공개되지는 않는 편이다.

 

12. 앞서 설명한 주요 기관들은 매1년 또는 5년마다 중요한 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들의 순서는 각 기관들 간의 상호 영향력 관계와 맞물려 있다. 일반적으로는, 당 전국대회가 개최되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위원회에서 다시 상급 조직에 대한 인선작업을 마무리 한 후 향후 5년간의 정책 방향을 결정한다. 그 다음 전국인대와 정협회의가 개최되어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가다듬게 된다. 이 중 매년 3월 초중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전국인대와 정협 회의를 양회(两会)라고 하는데, 그해의 국정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발표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는다.

 

13. 중국공산당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지만, 공산당 이외에도 다른 8개 정당이 존재한다. 이들을 민주당파라고 부르는데, 모두 1949년 이전에 건립되었다. 통일전선 협의체인 정협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실질적인 정당 활동은 매우 미진한 편이다.

 

14. 중국공산당의 주요 실력자들, 즉 중국의 정치 엘리트 집단은 서로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정치 엘리트들 간의 관계는 파벌 또는 계파 정치의 양상을 띠고 있는데, 수많은 계파들 중에서 상하이방, 태자당파, 공청단파가 특히 두드러진다. (1) 상하이방은 주로 상하이에서 당과 정부의 요직을 역임한 사람들과 상하이 출신의인사들로 얽혀져 있는 계파를 말한다. 특히 상하이 당서기를 역임한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후원 하에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 중앙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그가 상하이를 연고로 얽혀 있는 그의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세력이 확대되었다. (2) 태자당파는 대장정, 항일투쟁, 내전 및 건국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원로들과 당, 정, 군부의 고위층 관료들의 자녀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어떤 조직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부모를 매개로 한 비공식적인 인맥 관계를 통해 얽혀 있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등의 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최고실권자 시진핑도 태자당파로 분류된다. (3) 공청단파는 선진적인 청년 공산당원을 양성하는 기관인 공산주의청년단을 중심으로 얽혀진 정치계파이다. 대부분 해외 유학을 한 경험이 있어 개방적, 개혁적이며, 각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다. 또한 공산당 내의 부정부패 문제와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청렴한 것으로 평가되며 주요 인사들의 평균 연령도 낮아, 시진핑 집권 후반기에는 더욱 중용될 것으로 예측된다. 17기 총서기를 역임한 후진타오, 그리고 현재 국무원 총리인 리커챵 등이 대표적이다.

 

11. 중앙-지방의 네트워크와 대외정책

 

1. 중국은 34개(타이완을 제외하면 33개)의 급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省, 直辖市(베이징, 상하이, 톈진, 충칭), 소수민족自治区(5개),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가 포함된다. 강의록(PPT) 자료의 지도를 참고하여, 수업시간에 여러 번 언급된 몇몇 성들의 명칭과 위치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동북3성,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윈난성, 칭하이, 쓰촨성, 시짱(티베트), 신장(위구르) 등.

 

2. 지방행정체계는 상급에서 하급단위 순으로 성(省)급 → 지(地)급[地区급] → 현(县)급 → 향진(乡镇)급으로 위계화 되어 있다. 대부분의 성 명칭과 경계는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하급 단위의 그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역사가 오래된 편이다. 각 성들 간의 면적 및 인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어서 행정관리체계가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으나 성급 행정구역에 대해서는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지급 단위는 성, 현과 같은 전통적인 행정단위와 달리 상대적으로 최근에 생겨난 행정단위이다. 성 아래에 백 개 이상의 많은 현들이 있다 보니 현급 행정단위에 대한 관리가 어려워 지급 단위를 신설해오고 있다. 이러한 행정체계가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으며, 하층의 행정 단위는 개편이 잦은 편이다.

 

3. 분열과 통일을 반복해온 중국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중앙-지방 관계는 국가의 통일 및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2-3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화민국이라는 통일 국가가 존재했던 1910-20년대만 해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여러 지방에 군벌들이 난립하여 실질적으로는 분열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4.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중앙집권적인 국가 중의 하나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마오쩌둥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중국의 계획경제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국적인 차원에서 계획경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관료체계가 필요했는데, 수직적 차원의 명령체계가 지역 차원에서의 수평적 통합체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발달된 모습을 보였다.

 

5. 개혁개방 이후 중앙-지방 관계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중앙정부가 담당했던 경제계획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고 시장 원리가 확산되면서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점차 축소되었다. 각 지역실정에 맞는 개혁개방을 실행한다는 원칙하에 지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됨과 동시에 재정적 책임도 커졌다. 개혁개방 부작용의 하나인 지역 간 불평등은 지방정부들 간에도 나타났다. 경제가 발전한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방정부 간의 재정적 차이가 뚜렷해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중앙의 재정적 통제력도 약화되었다.

 

6. 지방정부간 재정 격차를 해소하고 중앙정부의 재정적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1994년에 분세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분세제 개혁의 핵심은 각종 세금의 종류에 따라 중앙과 지방정부의 수입원을 구분한 것이다. 이 개혁을 통해 중앙정부는 부가가치세의 75%, 개인 및 기업 소득세의 60%, 관세 등을 수입원으로 확보하게 되었으며, 부가가치세는 중앙정부의 가장 큰 세수항목을 이루고 있다. 분세제 개혁 결과 중앙정부의 재정상황은 급속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는 늘어난 세수 중 일부를 다시 경제발전이 더딘 지방에 보조금(재정이전) 형태로 지원함으로써 지역 간 재정 불균형 상태를 조정해오고 있다. 분세제 개혁으로 재정수입원이 줄어들거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 상태에 있는 지방정부는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지방성 조세를 신설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반강제로 수용하여 부동산을 개발함으로써 충당해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농촌 사회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7.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정책은 약 10년을 단위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왔다. 건국직후 몇 년간 유지되었던 소련과의 밀월관계는 1950년대 후반 사실상 끝났다. 제4-5강에서 살펴본 대약진운동 등의 모험적인 정책은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69년 소련과의 국경분쟁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되자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던 중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닉슨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중국은 다시 조심스럽게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화민국 (타이완)을 대신하여 UN에 복귀했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에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남순강화 이후의 1990년대에는 보다 과감하게 세계무대에서 자리를 넓혀갔다. 천안문사건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후에는 국제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8. 완전한 묘사가 아닐 수도 있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각 정권별 대외정책의 특성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자성어로 표현할 수 있다.

(1) 덩샤오핑 시대[1978-1992]의 도광양회(韬光养晦): ‘빛을 감추고 약점을 보강하면서 힘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발전과 현대화라는 최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평화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게 때문에, 밖으로는 미국, 유럽 및 일본 등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안으로는 경제건설에 주력했다는 점에서이다. (2) 장쩌민 시대[1992-2002]의 유소작위(有所作为):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 상태가 종식되자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 이 시기는 또한 천안문사건 및 신장, 티베트 문제 등으로 인해 중국의 인권과 민주화 문제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여론의 비판의 대상이 된 시기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이 문제들과 관련된 직접적인 마찰은 피하면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을 넓혀갔다. (3) 후진타오 시대[2002-2012]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떨쳐 일어선다’는 의미이다. 그간의 경제성장의 성과를 토대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이 급속하게 높아진 시기이다. 그러나 실업, 빈부격차, 지역간 불평등과 같은 내부 문제가 첨예화되기도 했다. 이에 후진타오 정부는 유교 등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화합’(和谐)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방침을 대외정책에도 적용했다. ‘중국위협론’이 거세짐에 따라 ‘화평굴기’ 대신에 화평발전(和平发展)이라는 용어로 전환했으며, 특히 자원외교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냈다. (4) 시진핑 시대[2012-현재]의 대국굴기(大国崛起): ‘강대국으로 우뚝 일어선다’는 의미이다. 이미 미국과 함께 세계 양대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확립되었으며, 경제를 넘어 정치와 군사 강국으로서 발전하고 있다. 시진핑 집권 초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중국의 정치 및 군사대국화 움직임이 오히려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12. 대륙 밖의 중국: 타이완과 홍콩

 

1. 타이완은 약 36,000㎢ 면적의 타이완 섬과 주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이완의 총인구는 약 2,336만 명이고 주민의 대부분은 한족이고 나머지는 타이완 원주민이다. 한족 중의 84%가 명청시기부터 이주해온 내성인과 객가인이고 14%가 1949년 전후로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해 온 외성인이다.

 

2. 타이완의 역사는 식민 통치와 군부 통치로 점철된 역사였다. 타이완은 일찍이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청말에는 청일전쟁 패배의 결과 일본에게 할양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타이완은 국민당에 의해 수복되었지만, 장졔스에 의해 1945년 5월부터 계엄령 하의 군부독재가 실시되었다. 1949년 국민당 군대와 정부가 타이완으로 퇴각한 이후 1970년대 말까지 본토와 타이완 간에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되었다.

 

3. 타이완의 문화는 고유의 역사적 과정을 반영하여 상당히 복합적이고 개방적이면서도, 중국 본토, 특히 복건성의 문화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타이완의 문화적 정체성은 국민당 정권 하에 발전된 중화 문명/문화의 계승자라는 인식과 중국 본토에 의해 재현된 중국과 다른 타이완 거주자라는 인식이 상존한다. 이로 인해 타이완 사람들은 ‘중국인’과 ‘타이완인’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형성해왔는데, 젊은 세대일수록 스스로를 타이완인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4. 중국 본토가 줄곧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해옴에 따라 국제무대에서 타이완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미국, 일본, 한국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와 동시에 타이완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서는 타이완이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명칭 또한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대신에 중화대만(Chinese Taipei) 등으로 불리고 있다.

 

5. 중국 본토와 타이완과의 관계를 양안관계라 일컫는다. 본토에서는 줄곤 ‘하나의 중국’ 정책에 입각하여 타이완과의 통일을 추구해오고 있다. 반면, 타이완에서는 본토를 수복하여 중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과 타이완이 별도의 국가로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유지한 채 경제적인 실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 등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있다. ‘92년 컨센서스’에 의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이와 관련된 표현은 각자의 방식에 따른다”는 ‘일중각표(一中各表)’가 양안관계의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중국 본토는 ‘하나의 중국’에, 타이완은 ‘각자의 표현’을 강조하는 등, 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6. 양안관계에 대해 역대 타이완 총통은 상이한 관점을 보였다. 장졔스는 1946년 이후 ‘중화민국’의 정통성과 재통일을 주장하며 1971년 국제연합을 탈퇴했다. 장징궈는 본토 수복 원칙 하에서 중국과 접촉도, 협상도, 대화도 거부한다는 ‘3불정책’을 실시했다. 후임 리덩후이는 일국양부 또는 일중일대의 원칙하에 민주와 자유를 바탕으로 통일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천수이볜은 일변일국을 주장하며 하나의 중국 원칙 대신 독립 노선을 추구했다. 재선에 성공한 국민당의 마잉주는 92컨센서스를 존중하여 일중각표 원칙을 강조하면서, 통일을 논하지 않고 독립을 거론하지 않으며 무력을 쓰지 않는다고 하는 신3불정책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7. 홍콩은 홍콩 섬, 구룡반도, 신계와 주변의 235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콩 전체 인구의 95%가 중국계이며 광동성 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공용어는 영어와 베이징어이지만 실생활에서는 광동어를 사용하고 있다. 산업은 1950년대 이전에는 중개무역 위주였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조립가공업이, 1960년대에는 전자산업이, 1970년대에는 기술집약적, 수출 위주의 산업이 발전했으며 이후 금융, 관광, 서비스산업이 발전했다.

 

8. 홍콩은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중국으로의 반환과 동시에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 또한 중국의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50년 간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고, 입법, 사법, 행정 등의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를 실시하며, 홍콩인들이 직접 대표를 선출하는 등 홍콩인들 스스로 통치하는 정책을 실시해 오고 있다.

 

9. 1990년대 초중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 홍콩인들은 대규모 해외 이민으로 홍콩을 떠났다. 홍콩인들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대륙인들의 홍콩 유입을 무척 경계했지만 최근에 이러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홍콩은 중국 경제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중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 최근에는 홍콩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제13강. 소수민족 문제와 조선족

 

1. 오늘날 중국인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라는 현재 중국인의 민족 구성은 역사적으로 최근에 발명된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변형되고 있다. 오늘날의 중화민족은 한족과 소수민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2. 소수민족은 역사적으로 한족 중심의 화이사상에 근거하여 비중화권 세계에 존재하는 이민족을 지칭하던 ‘4夷’ 개념이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 인식의 문화적 뿌리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전개되었던 소수민족 식별정책은 민족 성원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국정의 안정과 영토 보존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정치적 발명이었다.

 

3. 중국 국가와 당의 소수민족 정책은 정치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굴곡이 심했지만 그 기본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우호합작의 대가정을 이룬다. 둘째, 소수민족 집중 거주 지역에 대해 자치행정기관을 설치하고 자치권을 부여한다. 셋째, 소수민족의 분리 및 독립 요구는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넷째, 통일전선의 원칙이다. 이는 전 국토의 64%를 차지하는 소수민족 거주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진 것을 반영한 것으로 현지 유력자를 통한 간접통치의 형태를 띠고 있다.

 

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 정부는 시기에 따라 상이한 소수민족 정책을 적용해왔다. 1949년부터 1957년까지는 온건한 민족융화정책 시기로 분리독립을 하지 않는 한 민족 문화와 정체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1958년부터 1976년까지는 한족 중심의 급진적인 동화정책을 폈던 시기로, 소수민족의 저항은 지방민족주의로 규정되어 중앙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1978년부터 1976년까지는 다시 민족융화정책으로 회귀하여 소수민족에게 각종 특혜와 우대를 제공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다시 정치적 강경함과 사회경제적 통합을 시도하는 양면적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5.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은 한국에서 이주해간 사람들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중국 정부의 민족식별작업을 통해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통합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다. 19세기 중반, 청정부에 의해 내려진 만주에 대한 봉금령이 약화되자 조선인의 산발적인 만주 이주가 시작된 이래, 191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여 1940년대까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145만명에 달했다.

 

6.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조선족들은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을 도운 공훈을 인정받아 길림성 동부 연변에 조선족 자치구를 설립했다. 그러나 1955년 연변 조선족 자치구는 자치주로 격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족들은 신중국 초기 높은 경제력 및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를 영위했지만, 문화대혁명시기 조선족 학교가 통폐합되고 되고 한글 교육이 축소되는 등 부침을 겪었고 개혁개방 시기에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1992년 한중 수교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조선족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7. 조선족 인구는 1990년대 초반 이래 심각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의 취업 이주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동북3성 조선족들의 중국 내 대도시 진출도 궤를 같이 하고 있어 조선족 공동체의 급속한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조선족 사회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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