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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Peter Hong 2021. 8. 20. 16:16
홍유손을 아십니까? 조선 오백 년을 통틀어 최고의 사나이,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노익장, 요즘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사람입니다

홍유손(洪裕孫, 1431~1529)의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입니다. 광진자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청한자 김시습처럼 방외인(方外人)으로 살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하였습니다.

홍유손은 문벌을 중시 여기는 조선시대에 미천한 아전 집안 출신으로 태어나 김종직의 문인(門人)이 되었으니, 그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는 능한 문장(文章) 덕분에 부역도 면제받았으며, 5세 신동이었던 김시습이 그의 시(詩)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벼슬을 포기하고 세상에 은둔하여 백수(白壽)를 누리고 살다가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홍유손이 남긴 "소총유고(篠䕺遺稿)"에 소개된 시조 "제강석(題江石), 강가의 돌에 적다."입니다

濯足淸江臥白沙 (탁족청강와백사)
心神潛寂入無何 (심신잠적입무하)
天敎風浪長喧耳 (천교풍랑장훤이)
不聞人間萬事多 (불문인간만사다)

맑은 강에 발 씻고 흰 모래에 누우니
마음은 고요히 잠겨 무아지경이고
귓가에는 바람소리와 물결소리 뿐
번잡한 속세의 일은 들리지 않네

이처럼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뛰어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홍유손은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벼슬길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연산군 때는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납니다.

불의(不義)를 미워하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으며,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질(氣質)이 청한자 김시습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죽림칠현"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서 풍류의 세월을 보낸
"청담파(淸談派)"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재시인 김시습이 유일하게 인정한 뛰어난 시인이었으나, 76세가 되도록 아내가 없었습니다. 후사를 두기 위해 아내 감을 찾았지만 중신할미들은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로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호호백발에게 딸을 줄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비록 시집가서 하룻만에 과부가 된다 하여도 현명한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는 규수가 나타나 혼례를 치렀습니다.

그때 홍유손의 나이 76세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으니, 아마도 조선시대 최고령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홍유손이 아들을 얻은 나이에 대해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 에는 아흔으로, "묵암잡기" 에는 76세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사실 여부는 미심쩍지만, 어쨌든 대단한 기록입니다. 당시의 의료기술과 평균수명 등을 고려할 때, 76세든 아흔이든 진기록임에는 분명합니다.

홍유손이 나이 구십에 아들을 얻어 이름을 "지성(至成)"이라 지었는데, 그는 박학다문(博學多聞)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후진을 가르치매 그 문하에서 현달한 관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홍지성"은 선조 때 정유년(1597년)에 이르러 나이가 거의 팔십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부자가 양대에 걸쳐서 여덟, 아홉 임금이 바뀌도록 거의 200년을 지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일설에는 홍유손이 일흔여덟에 아내를 얻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지성은 그 둘째 아들이라고도 전해지고도 있습니다.

76세에 처음 장가를 들어 아들도 하나 낳고, 명산(名山)을 두루두루 편력하다가 99세에 선화(仙化)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계 성혼의 "묵암잡기" 에는 그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늦동이 갖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재혼이 늘어나고, 형제가 없는 아이들의 성격문제, 경제적 여유 등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정관 복원수술의 빈도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홍유손이 노인이 되어서도 생산(?) 능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편안한 생활과 건강관리입니다. 홍유손은 비슷한 처지의 선비들과 어울려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야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을 유람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교통수단이 없던 당시 상황에 미루어 홍유손은 일반인에 비해 상당한 건강을 유지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으므로 피비린내 나는 당쟁싸움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더불어 조선의 유교사상 속에 살았던 사람으로 후사를 두어야 한다는 정신적 의지도 강했을 것입니다.

홍유손의 저서로 "소총유고(篠叢遺稿)" 가 있는데, 국화에 비유하여 선도(仙道)의 양생법(養生法)을 잘 설명하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수명이 늘어나서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램입니다. 한 번쯤은 홍유손의 건강법과 처세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