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영희]영어 때문에 재능 묻히면 안돼요
미연 양에게.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다고, 내가 쓴 교과서로 영어를 배우게 됐다고 내게 e메일을 준 미연 양, 우선 축하의 마음부터 전해야겠지요? 우리는 늘 ‘초등학교 어린이’라고 말하지만 중학생이 된다는 것은 이제 ‘어린이’에서 벗어나 어쩌면 미연 양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과 경험을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지요.
미연 양은 말했지요. 중학교 때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해서 생활영어를 마스터하고 어른이 되어 성공하고 싶다고. 아마 요즈음 언론에서 하도 많이 ‘생활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어린 미연 양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미연 양, 선생님은 미연 양의 그 비장한 결심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걱정된답니다.
미연 양, 궁극적으로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지 ‘생활영어’를 잘하려고 영어를 배우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다언어 국가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우리말을 두고 우리끼리 영어로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외국인 관광가이드가 될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배낭여행을 하거나 더 편리하게 오렌지를 사먹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외국어는 목적 아닌 도구일 뿐
단순히 일상생활만을 하기 위한 ‘생활영어’라면 실제로 영어권 나라에서 살면 극히 짧은 시간 내에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더욱 당당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세계에 한국, 한국사람을 내세우기 위함입니다. 영어로 수집돼 있는 고급 정보를 더 편리하게 흡수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나만의, 즉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사람 김미연의 실력을 다지고 전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미연 양, 콘텐츠라는 말 알지요? 즉 ‘어떻게 말하는가’ 이전에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서 상상력과 지식을 키우고,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교양을 쌓아서 미연 양이 갖고 있는 재능, 즉 미연 양의 콘텐츠를 계발하는 일이 영어를 배우는 일보다 더 우선돼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재능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이 미연 양 나이일 때 이미 숫자에는 거의 백치임이 판명됐고, 다소 언어에 재능이 있고 문학이 좋아 나는 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미적분을 몰라도 내 분야에서 큰 과오 없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습니다. 미연 양이 언어보다는 숫자나 미술, 음악에 재능을 갖고 있다면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 재능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낭비입니다.
미연 양이 앞으로 3년 동안 배울 영어교과서를 쓴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인지 모르지만, 나는 미연 양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영어에만 바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영어만 잘하는 바보가 되는 것은 미연 양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아주 끔찍하고 슬픈 일이기 때문이지요.
미연 양, 오해는 하지 마세요. 물론 영어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 영어만이 능사가 될 순 없다는 말이지요. 영어는 단지 수많은 의사소통 도구 중 하나일 뿐, 절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미국에 가면 지하철의 거지도, 거리의 부랑자도, 차이나타운의 갱도 다 영어를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유창하게 영어를 해도 지식과 교양이 없는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결국 미연 양이 말하는 ‘성공’을 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은 절대로 영어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깊이 있는 지식-창의력에 관심을
영어를 배우든 그 무엇을 하든, 남보다 좀 더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깊이 분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남보다 좀 더 새롭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창의적인 눈,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눠 주고 싶은 나눔의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새봄과 함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미연 양, 이 세상의 모든 지식과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큰 꿈을 이루고 큰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한국인으로 성장할 것을 기원합니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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