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사랑의 조건을 내걸 때
한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한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다고 한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죠?”
남자는 상심하여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겠소?”
여자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백일동안 매일 밤 내 창가에 와서 나를 지켜본다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겠어요.”
남자는 그날 저녁부터 의자를 들고 와 그녀의 창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앉았다.
별이 떠오르고 밤이슬이 내리고...아침이 되자 남자는 지친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때로 비가 내리는 밤이 있었다.
때로 바람이 부는 밤이 있었다.
때로 살을 에는 듯 추위가 엄습해오는 밤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느 밤에는 여자의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어느 밤엔 일찍 불이 꺼지고, 어느 밤에 새벽이 될 때까지 무도회가 열렸다.
때론 여자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다 무심코 커튼을 젖히고 내려다 본 창밖에 남자는 있었다.
때로 깊은 밤 어지러운 꿈에 쫓겨 잠이 깼을 때도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여자는 생각했다. 저러다가 곧 그만둘 거라고.
한달이 지나자 여자는 생각했다.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두달이 지나자 여자는 생각했다. 당장 달려 나가 남자의 지친 어깨를 감싸주어야 한다고.
석달이 지나자 여자는 다짐했다. 남자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겠노라고.
아흔아홉번째 밤이 깊었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의 창을 올려다보며 앉아있었다.
백번째 밤이 찾아왔다.
여자는 설레는 가슴으로 창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남자는 없었다. 빈 의자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미완의 하룻밤을 남겨두었다. 사랑은 조건을 이룬 후에 그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어떤 단서를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여자가 조건을 내거는 순간 이미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아흔 아홉번째 밤까지 여자의 곁에 있었다. 사랑했던 여자를 위한 마지막 헌사요 희생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마라톤처럼 긴 거리를 다 달린 후에 비로소 얻어 쓸 수 있는 왕관이 아니라는 점을 여자가 알기를 바랐다.
/조창인 실화소설 ‘그녀가 눈뜰 때’ 3권 55쪽~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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