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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또 아일랜드계에서 나올까

Peter Hong 2007. 6. 8. 05:55
  • [Why] 미국 대통령 또 아일랜드계에서 나올까
  • 민주당 유력주자 오바마 먼 조상도 아일랜드인說
    이민 초기 反카톨릭 정서에 맞서 정치 세력화 주로 대도시 정착…
    뛰어난 조직력으로 막강 파워 美 인구의 12%… 역대 대통령 15명 배출
  • 윤정호·예일대 박사과정(美·英 정치학 전공)
    입력 : 2007.06.01 23:21 / 수정 : 2007.06.01 23:53
    • 지난 3월 대서양 양안(兩岸)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와 미국 그리고 영국 언론들이 앞다퉈서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힐러리와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오바마의 먼 조상이 아일랜드인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계에서 아이리시 아메리칸(Irish American)의 파워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또 한 명의 아이리시 대통령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들뜨게 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백악관은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의 독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명의 대통령들 중 앤드류 잭슨(Jackson), 제임스 뷰캐넌(Buchanan), 율리시스 그랜트(Grant), 체스터 아서(Arthur), 그로버 클리블랜드(Cleveland), 윌리엄 맥킨리(McKinley), 우드로 윌슨(Wilson), 존 F. 케네디(Kennedy), 린든 존슨(Johnson), 리처드 닉슨(Nixon), 지미 카터(Carter), 로널드 레이건(Reagan), 조지 H. W. 부시(Bush), 빌 클린턴(Clinton) 그리고 조지 W. 부시(Bush) 등 최소한 15명 이상은 아이리시 혈통을 지녔다고 알려지고 있다. 과연 오바마가 이들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을지, 최초의 아일랜드계 흑인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정치 무대의 주역뿐만 아니라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아이리시의 정치 영향력은 엄청나다.

    • ▲아일랜드 최대의 축제일인 성 패트릭데이(St. Patrick’s day)를 맞아 미국 뉴욕 5번가에서 성대한 시가행진이 펼쳐지고 있다. 성 패트릭 데이(3월 17일)는 아일랜드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패트릭 주교를 기념하는 날로, 전 세계에서 아일랜드 고유 문화를 기념하는 날로 정착됐다. /AP

    • “아이리시 아메리칸의 표심을 잡아라.” 미국의 차기 대권 레이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들 중 하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유권자들을 향한 뜨거운 구애작전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존 맥케인 애리조나 상원의원. 그는 지난 해 6월, 아이리시 아메리칸 단체들이 주최한 이민법 개정 집회에 참석했다. 법 개정에 아일랜드계의 목소리가 최대한 반영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2월 28일에는 ‘아이리시 아메리칸 공화당원 모임 (The Irish American Republicans)’이 개최한 리셉션에 연사로 나서 지지를 호소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히는 힐러리 클린턴 뉴욕 상원의원도 아이리시 아메리칸 유권자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 3월 12일, ‘이민법 개정을 위한 아이리시 로비 (The Irish Lobby for Immigration Reform)’가 주최한 행사에 얼굴을 비친 그는 새로운 이민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임을 다짐했다. 8일 뒤에는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아이리시 아메리칸 민주당원 모임(Irish American Democrats)’ 행사에 참여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다고 역설했다.

    • 공화·민주 양당의 내로라하는 대선 주자들이 이토록 열렬히 구애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주요 도시에 대거 거주하며 빼어난 조직력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무엇보다 이들은 엄청난 ‘수’를 자랑한다. 2005년 3월, 인구조사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자신이 아이리시 혈통을 지녔다고 답한 미국인들의 숫자는 3400만명이나 된다. 이른바 ‘스콧츠 아이리시(Scots Irish)’들을 제외하고도 아이리시의 피가 흐르는 미국인들은 미국 전체 인구의 12%에 달하는 것이다.

      그만큼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국토방위청이 2004년 9월에 발표한 ‘2003년 이민통계연보’에 따르면 1820 회계년도 이래 합법적으로 이민을 온 아일랜드인들은 48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일랜드계는 독일계와 영국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이민자 그룹인 셈이다. 그럴 만도 하다. 아일랜드인들의 미국 이민 역사는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민사만 오래된 것이 아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소규모에 그쳤던 이민자들의 규모는 19세기 초반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20년에서 1960년 사이 미국 땅을 밟은 이민자들 중 약 3분의 1은 아일랜드인이었다. 적게는 수십 만명, 많게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감자 기근 (Potato Famine)’이 일어난 19세기 중반에는 거의 200만명에 가까운 아일랜드인들이 미국행 이민선에 몸을 실었다. 1840년대의 경우 이민자들 중 절반이 아일랜드 출신일 정도였다. 대서양을 건너온 아일랜드인들은 거의 대부분 대도시들에 정착했다. 이렇다 할 연고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극심하게 빈곤했던 그들은 내륙으로 진출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톨릭 신부들의 만류도 한 몫을 했다. 대도시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신부들은 독실한 카톨릭 신도들인 아일랜드인들을 교구에 머물게 해 교세를 확장 하려고 했다. 그 결과 1870년 당시 아이랜드 이민자들의 42%는 25개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다른 백인들의 경우 같은 시기 도시 거주자들의 비율이 불과 10%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높은 도시 거주 비율이었다. 이를 통해서 대도시 인구 중 상당수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도시에 자리를 잡은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정치 세력화에 빼어난 능력을 보였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 정치 세력화는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다.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도착한 미국은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앞서 정착해 있던 이들은 갖은 이유를 들어 새로운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이 종사할 수 있는 직종은 극히 제한됐다. 철도, 운하 건설, 부두 노역 등 저임금으로 악명 높던 육체 노동은 모두 아이리시 아메리칸의 몫이었다. 경찰관과 소방관, 군인등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직종들도 아이리시의 독차지였다.

      둘째,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Schlesinger Jr.)가 “미국인들의 가장 고질적인 편견”이라고 부른 바 있는 반(反) 카톨릭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넘어온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불신과 편견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폭력화하기 시작, 메사추세츠주의 찰스타운 폭동을 기점으로 20년동안 맹위를 떨쳤다. 1850년대 중반에는 이같은 정서에 힘입은 ‘아무것도 몰라요당 (Know Nothing Party)’라는 정당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이 같은 정서의 주요 타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들은 소위 ‘머신 정치 (Machine Politics)’를 발판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갖춰나갔다. 대도시에 기반한 아일랜드 출신의 정치 보스들은 공직과 복지 혜택을 마련해 주는 조건으로 갓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했다.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을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정치적 위상은 급상승할 수 있었다. 특히 도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유권자들을 주요 지지층으로 삼았던 민주당에게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물론 머신 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공무원 채용 과정에 대한 개혁과 함께 정부 주도의 복지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설 땅을 잃었다. 그러나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회장직을 독식하다시피 해오고 있을 뿐 아니라 에드워드 케네디 (Kennedy) 메사추세츠 상원의원과 짐 맥가번 (McGovern) 메사추세츠 하원의원, 그리고 척 슈머(Schummer) 뉴욕 상원의원과 조셉 크로울리 (Crowley) 뉴욕 하원의원 등 쟁쟁한 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속속 배출해 오고 있다.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공화당 내에서도 영향력이 감지되고 있다.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공화당의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떠오르고 있다. 낙태와 동성연애 등이 핵심 정치 이슈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카톨릭계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계 유권자들 사이에서 공화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민주당의 열성적 지지자들이었던 카톨릭교도들은 1980년대에 들어 유동층으로 변했다. 카톨릭 유권자들 중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숫자는 선거를 거듭할수록 늘어왔다.

      2000년과 2004년에 치러진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는 공화당이 오히려 민주당을 앞섰다. 민주당의 선거 전략가인 스탠 그린버그(Greenberg)와 매트 호건 (Hogan)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선거 당시 카톨릭 유권자들 중 45%는 민주당 후보인 알 고어를 지지했던 반면, 52%는 부시를 지지했다. 4년 뒤에는 차이가 두 자리 수로 늘어났다. 존 케리를 지지한 카톨릭 유권자들은 43%에 그쳤다. 이에 반해 부시는 56%의 지지를 얻었다. 공화당은 이 같은 추세에 가속도를 붙이려 하고 있다.

      부시와 딕 체니를 위시해서 수전 콜린즈(Collins) 메인 상원의원과 크리스토퍼 셰이(Shay) 코네티컷 하원의원 등 아일랜드 혈통을 지닌 7명의 상원의원 및 57명의 하원의원들이 소속되어 있는 ‘아이리시 아메리칸 공화당원 전국회의’와 같은 조직을 통해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에 대한 공략에 나서고 있다. 공화당의 공식 입장과는 동떨어진 견해를 추구한다고 해서 이단아로 불리곤 하는 맥케인도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에 대한 구애에서만큼은 예외가 아닌 것이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 대우를 다룬 ‘아이리시들은 어떻게 백인이 되었나 (How the Irish Became White)’의 저자인 노엘 이그나티에프 (Ignatiev)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오랜 기간 심한 차별 대우와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아이리시 아메리칸들. 이제 누구도 그들을 멸시할 수 없게 되었다. 좌절과 실의를 딛고 한 때 도저히 이룰 수 없을 듯 보였던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되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키워드… 아이리시 아메리칸(Irish American)은

      미국은 인구의 74%가 백인이다. 이들 미국 백인들 가운데 ‘빅 3’가 독일계 미국인(약 4300만명), 영국계 미국인(약 3600만명), 아일랜드계 미국인(약 3400만명)이다. 이중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바로 아이리시 아메리칸이다.

      영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1600년대부터 시작됐다. 대부분 개신교인 이들은 미국 전역에 고루 퍼졌다. 역대 대통령 대다수가 영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 막강한 파워를 형성했다.

      1700년대부터 이주하기 시작한 독일계 미국인은 펜실베니아, 뉴욕, 뉴저지에 주로 정착하며 독일의 전통을 유지했다. 하지만 1차대전 이후 독일어 신문, 학교, 단체 등이 폐쇄되며 위축됐다.

      아일랜드인들은 주로 19세기 중반에 기아와 빈곤을 피해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다른 백인 그룹과 달리 핍박 속에서 시련을 이겨낸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개종 강요와 탄압을 받았던 아일랜드인들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세운 미국에서도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

    • ▲윤정호·예일대 박사과정
    • 미국의 보스턴,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 빈민가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은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구인 광고에는 “Help Wanted, No Irish Need Apply(NINA)’라는 문구가 있었다. 아일랜드인은 고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NINA운동’이란 이름으로 미국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이리시 아메리칸들은 건설 직업에 주로 종사하면서 서서히 입지를 다져나갔다. 뜨거운 교육열을 가진 그들은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며 위상을 높였다.

      미국의 35대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이민 4세였다. 취임 후 아일랜드를 방문한 케네디는 “내 증조부가 아일랜드를 떠나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있던 것은 강한 신앙심과 자유에 대한 갈망, 두 가지뿐이었다”며 “내가 그런 조상들의 신앙과 신념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서 밝힐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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