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맑아지는 글’에 대한 반항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그래, 나는 오늘도 헛되이 보냈다. 아니 오늘뿐인가, 어제도 그제도 계속 헛되이 보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어제 죽은 사람 대신 내가 살아 있어 죄의식이라도 느끼란 말인가.)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다. (이 말은 뒤집으면 한결같은 삶이 아주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아닌지?)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말이다. 우산을 들어주면 둘이 다 조금씩이라도 비를 그을 텐데 왜 멀쩡한 우산을 두고 함께 비를 맞아야 하는지?)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 일은 잘 풀리고 내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운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운다. (부족함, 넘침을 배워서 무엇 하는가.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딱 알맞음을 배우고 싶다.)
따지고 보면 구구절절이 맞는 말인데 순전히 반항을 위한 반항을 하는 내 마음속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 마음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반항아에 대해 생각했다. 겉으로는 평화와 질서, 희망을 찬미하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는 질서에 반항하고, 조화를 깨뜨리고 싶어 하고,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고 싶어 하는, 희망을 거부하는 존재가 분명 어디인가 숨어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같이 불쾌지수 높고 세상이 굴러가다 어디엔가 걸려 삐거덕거릴 때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은 ‘에잇 이놈의 마뜩잖은 세상!’ 하고 불쾌지수를 핑계 삼아 세상에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 교수가 보내 준 ‘마음이 맑아지는 글’에는 마지막으로 두 문장이 더 남아 있었다.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은 첫째, 날 사랑하는 사람들, 둘째,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셋째, 무언가 내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
오늘 반항을 일삼는 내 마음도 이 말에는 반기를 들지 못했다. 내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지금 내 책상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앞으로 더는 할 일이 없다면…. 아,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3% 좋은 생각’이 삶을 지탱
‘마음이 맑아지는 글’은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는 말로 끝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날 내 마음은 티격태격 반항에 반항을 거듭하지만 내 마음속 3%의 예쁜 생각은 어느새 바람이 상글해지면서 들국화, 맑은 햇살, 파란 하늘을 벌써부터 꿈꾼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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