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만
칼레의 시민,
1,
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인천의료원 의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약국을 통한 마스크 판매는 경북 문경의 한 약사의 청원에서 시작됐다. 코로나19 신속 검사키트를 개발한 것은 민간기업들이다. 한국판 ‘칼레의 시민들’은 정부가 엎지른 물을 최대한 잘 수습하고 있다. 정부만 궁지에 처한 이웃 나라를 돕는 것과 자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방역을 하는 것을 구별해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 2020년3월11일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우리만 모른 방역의 기본』 중에서.
2,
백년 전쟁 초기인 1345년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칼레(Calais)란 곳에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오랜 공방을 벌입니다. 그러나 칼레시민들도 봉쇄된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고 맙니다. 화가 난 에드워드 3세는 칼레시민들에게 다 죽이지 않을 테니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서 목에 밧줄을 걸어서 죽을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합니다. 에드워드 3세의 요구에 한동안 침묵하다가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제일 먼저 나서고 이어서 시장과 법률가 등 귀족 계급 5명이 동참하였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시작입니다. 다음 날 묶인 상태로 영국왕 앞으로 나갔는데 마침 영국왕비가 숙원인 임신을 했던 시기라 자기 자신의 아기를 위해 사형을 면해 달라고 간청해서 그들은 살게 됩니다.
이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1884년 칼레 시는 이들의 모습을 동상 같은 조각으로 남기고자 하고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 이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칼레시는 영웅의 모습을 원했는데, 정작 로댕이 내놓은 것은 영웅이 아닌 인간의 모든 고통을 간직한 그들의 모습, 결연하다 못해 침울한 모습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모습까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를 깍고, 자루 같은 옷을 입고, 교수형을 당할 때 쓰일 밧줄을 목에 두르고, 칼레성의 열쇠를 손에 든 채, 맨발로 영국왕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침울하고 지친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패배로 인한 낭패감, 눈앞에 닥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비극적이지만 용감한 희생을 감수하려는 영웅심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일줄 알았던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곧이어 당황한 칼레시를 상대로 로댕의 설득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더해 벨기에의 한 잡지가 ‘지극히 두려운 상태에서도 시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상화 되어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그려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이 논평 때문에 칼레시는 결국 로댕의 조각을 받아들입니다. 로댕은 이 조각에 받침대를 설치하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후에 로댕은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높은 곳에 설치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느라 진실을 잊게 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로댕은 차가운 조각 속에 인간의 감정적 요소를 그려낸 위대한 예술가였습니다.
▲The Burghers of Calais by Auguste Rodin, in 国立西洋美術館 The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Tokyo,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