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당문답(公堂問答)
✨공당문답(公堂問答)
세종 임금 때 청백리 맹사성(1360~1438)은 오늘날 공직자들의 귀감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그는 세종 때에 류관 · 황희와 함께 3청(淸)으로 이름났다. 맹사성은 그의 호 고불(古佛)처럼 허리가 구부정하고 촌로(村老)처럼 검은 소를 타고 피리 불고 다니는 소탈한 재상이었다. 그는 청빈은 말할 것도 없고 소통의 달인이었다. 그 일화가 바로 공당문답(公堂問答)이다.
그는 아버지 맹희도가 충청도 온양에 계셔서 문안을 드리러 거의 매주 온양을 갔다. 언제인가 한번은 온양에서 서울로 가는 도중에 경기도 용인에서 큰 비를 만났다. 그는 객관에 들어가지 않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에는 비를 피하려는 손님이 많아 빈방이 없었다. 맹사성은 헛간 방 하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청이 딸린 특실 방은 젊은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 젊은이는 맹사성이 측은해 보였는지 대청으로 올라오라고 청하였다. 두 사람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장기만 여러 판 두었다.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맹사성은 젊은이에게 식사 내기로 ‘말꼬리 잡기’ 문답놀이를 청하였다. 말끝에 반드시 ‘공’과 ‘당’이라는 토를 넣어 문답을 하여 말문이 막히는 자가 저녁식사를 사기로 하였다.
맹사성은 젊은이에게 “내가 나이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리다.”하고 먼저 묻기를,
“어디서 왔는 공” 하자 젊은이는 “영주에서 왔당” 하였다.
“어디로 가는 공” 하니 “서울로 간당” 하였다.
"무엇하러 서울로 가는 공.” 하자 “벼슬을 구하러 간당.” 하였다. “무슨 벼슬인공.” 하니까 “의정부 녹사(錄事)란 당.”하였다.
의정부라면 맹사성이 정승으로 있는 곳 아닌가? 맹사성이 무심결에 “내가 합격시켜 줄 공.” 하니, 젊은이는 황당해하며, “아니 무슨 말씀인지요.” 하였다. 결국 젊은이가 내기에 져서 맹사성은 술과 밥을 잘 얻어먹었다.
며칠 후에 맹사성이 의정부에 있는데 용인 여관에서 만났던 그 젊은이가 녹사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맹사성이 옆에 가서 “시험 잘 보았는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맹사성이 정승인 줄 알고는 “나, 죽었당.”하면서 납작 엎드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맹사성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맹사성이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 모두들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젊은이는 녹사가 되었고, 그 후 그는 맹사성의 추천을 받아 여러 고을 원님을 지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일러,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 하였다. <연려실기술>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공당문답’ 일화는 두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는 맹사성이 용인현감에게 연락하지 않고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점이다. 정승 정도이면 현감에게 연락하여 융숭하게 대접 받고 객관에서 편히 지냈을 것인데 맹사성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공(公)과 사(私)의 구분이 철저했다.
둘째는 맹사성이 여관에서 머문 것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백성들 옆자리에서 술 마시고 식사하면서 민심을 귀동냥한 것이다. 즉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흔히 소통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소통은 쉽지 않다. 갑은 을에게 일방통행이고 을의 말을 들으려고도 않는다. 소통과 대화는 리더십의 기초이다.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정치가 · 고위공직자 · 경영자라면 ‘공당문답’의 의미를 한번 쯤 새겨볼 일이다.
~모셔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