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1.
우리나라 말이 유달리 어려운 건 많은 다의어(多義語)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해 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모네의 그림 《수련》 앞에서 속으로 잠깐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모네의 《수련》 앞에서 꽃 《수련(睡蓮)》보다 당시 재활의학과 전공의 《수련(修練)》 관련 일에 짓눌려 있던 제 처지가 떠올라 그랬습니다.
어쨌든 억지를 부리자면 그래서 좋은 점도 있겠습니다. 지금 마음이 좀 힘들다거나 인격 수양이 필요하다거나 한 경우 이곳에 《수련》 그림 하나 떡 하니 올려놓고 은유적으로 《수련(修練)》이 필요한 마음의 상태를 에둘러 표현하는 그런 고상함도 표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어제 그제 비가 세차게 퍼부었습니다. 여름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곧 수련이 피어나는 달이 오겠습니다.
뉴욕 언론이 ‘세기의 경매’라고 명명한 ‘페기·데이비드 컬렉션’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열렸습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진행된 경매를 통해 총 8억2800만 달러(약 8800억원)에 낙찰돼 단일 소장자의 컬렉션으로는 사상 최고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경매의 수익금이 전액 기부되는데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록펠러 부부의 뜻에 따른 것으로 부부는 생전에 이미 컬렉션 경매를 계획했습니다. MoMA와 하버드대, 록펠러대, 음식과 농업을 연구하는 스톤반스센터 등을 포함한 기부금을 받을 12개 단체도 20년에 걸쳐 골라놓은 상태였습니다.
록펠러 컬렉션 가운데 최고가는 파블로 피카소의 1905년 작품인 《꽃바구니를 든 소녀》로 1억1500만 달러(약 1240억원)에 낙찰됐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만개한 수련》이 8470만 달러(약 900억원)에 팔렸는데요, 《만개한 수련》의 경우 낙찰 예상가였던 5000만 달러를 크게 뛰어넘으며, 모네 작품으로는 최고 낙찰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종전 기록은 8100만 달러였습니다.
3. 세계의 존재 이유,
『꿈꿀 권리』는 바슐라르의 미술론을 모은 책으로 예술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이 책은 수련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통지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수련은 여름 새벽이 일으키는 기적이자 바로 미적 계시의 순간이라고.
“그토록 많이 되찾아진 젊음, 낮과 밤의 리듬에 대한 그토록 충실한 복종, 새벽의 순간을 알리는 그 정확성, 이것이야말로 수련으로 하여금 바로 인상주의의 꽃이 되도록 한 이유인 것이다. 수련은 세계의 한순간이다. 그것은 두 눈을 지닌 아침이다. 그것은 또한 여름 새벽의 놀라운 꽃이다.”
밤이 되면 수련은 꽃잎을 오므리고 잠들 채비를 하는데, 진흙 속에 뿌리를 담그고 날이 밝으면서 다시 꽃잎을 펼친다. “물과 태양의 순결한 처녀”로서 빛과 함께 되살아나는 수련은 우리에게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꽃이기도 하다. 올해 여름 새벽에 보았던 수련은 작년의 여름 새벽에 보았던 그 수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수련이 지고 나면 여름은 끝나고, 그 여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수련도, 여름도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프랑스 화가 모네는 수련의 시인이다. 화가들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심사숙고하는 몽상가들로, 물질화된 우주의 반향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빛, 형태, 색채로 드러낸다. 모네는 특히 수련을 즐겨 그렸는데, 바슐라르는 모네의 그림을 통해 여름 새벽의 기적을 만드는 수련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는 모네의 수련이 떠 있는 연못 풍경 앞에서 깊은 몽상에 잠겼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다. “세계는 보여지기를 바라고 있다. 바라보기 위한 눈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물의 눈, 조용한 물의 커다란 눈이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장석주, 중앙북스, 中에서,
p.s.
마음의 서운함은 세찬 빗물에 흘려보내고 아침 빛과 함께 되살아나는 수련 한 송이 바라보며 삶을 관조하는 그런 인생,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가까이에 함께 할 수 있는 분들이 있어 참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고성은/건국대의대 교수